◈ 舊 한국은행(현 화폐박물관)
우리나라 초기 근대 건축물로서 대한민국 금융의 역사와 함께 해온 유서 깊은 화폐박물관 건물은 1981년 국가중요문화재인 사적 제280호로 지정되었다.
1907년 일본 제일은행이 사용하기 위해 공사를 시작했으나, 1909년 대한제국의 중앙은행으로 (구)한국은행이 설립되어 준공 이후에는 (구)한국은행 건물로 사용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구)한국은행이 조선은행으로 개칭되고, 1912년 건물이 완공된 뒤에는 조선은행 본점 건물로 이용되었다.
이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르네상스 양식의 석조 건물로 실용성과 견고함을 강조하였으며 외관상 형태는 위에서 내려다 볼 경우 ‘井(정)’자 모양이고, 정면에서 볼 경우 현관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이다. 철근 콘크리트 구조에 외벽은 화강암으로 마감하였으며 이 건물에서 느껴지는 역사적인 분위기는 화강암이 지닌 견고하고 육중한 이미지에서 비롯된다. 건립 당시 내부 바닥은 목재로 천정은 석고로 마감하였고, 건물 지하에는 대형금고가 있었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던 건물이다. 1950년 6월 12일 한국은행이 대한민국의 중앙은행으로 창립되면서 한국은행 본점 건물이 되었으며, 한국전쟁 때에는 내부가 거의 파괴되었는데 1958년 복구되었다. 1987년 이 건물 뒤편에 한국은행 신관(현 본관)이 준공되면서 원형복원 공사를 착수하였으며 외벽은 이전과 같이 복원하였으나 내부는 대리석으로 마감하는 등 현대적 건물로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변경하여 1989년 완공하였다. 이후 2001년 한국은행 창립 50주년을 맞이하여 화폐박물관으로 개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출처 :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서울중앙우체국 6층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 舊 제일은행본점(백화점 옆건물)
옛 제일은행 본점(舊第一銀行本店)은 1935년에 지어진 은행 건물이다.
원래는 조선저축은행의 본점 건물로 지은 것이다. 조선저축은행은 1928년 제정된 저축은행령에 의하여 1929년 조선식산은행의 저축에 관한 예금 업무를 인수하여 설립되었다. 그리고 조선저축은행 본점이 신축될 때까지 조선식산은행 사옥 내 방 2개를 임대하여 6년 5개월 동안 업무를 취급하였다.
본 건물은 현상설계를 통하여 설계되었고, 1931년 신축계획이 세워졌다. 그 모토는 ‘서민금융의 전당답게’였다. 대지는 미쓰코시 백화점(현재의 신세계 백화점 명품관)에 인접한 남측 대지 2,157.03m2을 확보했다. 이 자리는 원래 경성거류민단역소와 남부경찰서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후 합병 등으로 은행의 이름이 한국저축은행·제일은행·SC제일은행으로 바뀌어서 지금에 이른다.(출처: 위키백과)
◈ 배재학당
1885년 8월 미국 북감리교회 선교사 H. G. 아펜젤러가 설립했으며, 1886년 고종 황제가 배재 학당이라는 교명을 내려주었다. 1909년 4월 배재 고등학당으로 인가받았고, 1916년 배재 고등 보통학교(5년제)를 설립하여 병설 운영했다. 이화 학당, 경신 학교와 함께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선구적 역할을 한 선교계 최초의 사립학교이다. 초창기 학생은 20명 정도였고, 교과목은 영어였다. 개설한 지 4년 후에 학칙이 마련되어 학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890년경에는 영어를 비롯해 한문, 천문, 역사, 지리, 생리, 수학, 수공 및 성경 등을 가르쳤다. 과외 활동으로 연설회, 강연회, 토론회 등이 있었고 야구와 농구, 축구, 정구 등 운동 경기도 있었다. 1925년 배재 학당이라는 교명을 폐지하고, 미군정하인 1945년 다시 개교했다.
◈ 덕수궁 중명전
덕수궁(德壽宮) 돌담길을 돌아 뒤쪽으로 가면 현재 정동극장이 있고, 그 골목으로 들어가면 '중명전(重明殿)'이 있다. 중명전은 원래 정동지역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에 속해 있다가,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이 확장되면서 궁궐로 편입되었다.
이때 당호를 ‘수옥헌’이라 짓고, 주로 황실 도서관(King's Library)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1901년 화재로 전소된 후 재건되어 지금과 같은 2층 벽돌 건물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의 설계는 독립문, 정관헌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I. Sabatin)이 하였다. 중명전은 대한제국의 중요한 현장이다. 특히,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 대화재 이후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황제의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불법적으로 체결되었으며 그 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로 이준 등을 파견한 곳도 바로 중명전이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한편 중명전은 1925년 화재로 외벽만 남기고 소실된 뒤 다시 재건하여 외국인을 위한 사교클럽으로 주로 쓰이다가 자유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유재산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은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중명전을 돌려주었다. 1977년 중명전은 다시 민간에 매각되었다. 그 후 2003년 정동극장에서 매입한 뒤 2006년 문화재청에 관리 전환하여, 2007년 2월 7일 사적 제124호로 덕수궁에 편입되었다. 2009년 12월 복원을 거쳐 2010년 8월부터 전시관(‘대한제국의 운명이 갈린 곳, 덕수궁 중명전’)으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 舊 양정의숙(손기정기념관)
양정의숙(養正義塾)은 1905년 2월 엄주익(嚴柱益)이 창설한 근대식 사립학교로 현 양정고등학교와 양정중학교의 전신이다. 1905년 5월 12일 개강하였다. 법률학과·경제학과를 두었으나 1913년 '조선교육령'에 의해 전공학과는 폐지되고, 교명을 양정고등보통학교로 개칭하였다.(출처: 위키백과)
◈ 독립문(獨立門)
1898년 1월 자주독립의 상징물 건립을 위하여 독립협회의 주관으로 이루어졌으며, 기금은 협회가 모금한 돈으로 충당되었다. 중국 사신을 맞이했던 영은문 자리에 한국인 기사 심의석에 의해 중국인 노동자를 고용하여 구축한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다. 높이 14.28m, 넓이 11.48m로 프랑스 개선문을 모방하여 만든 건축물이다.
1979년 성산대로 건설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 독립문은 조선 말기 독립협회의 대표적인 사업 중 하나였지만, 일본이나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기보다 주로 중국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을 강조하는 상징물이었다.
◈ 경교장
광화문과 서대문 사이에 있던 동양극장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자리이다. 최창학 소유의 별장이었던 이 집은 1938년 완공 당시에는 죽첨장이라 하였으나, 김구가 경교장이라 개칭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함께 귀국한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집무실에서 육군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되기까지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건국에 대한 활동 및 반탁, 통일운동을 이끌었다. 이후 타이완 대사관 관저, 국군의료진 주둔지, 남 베트남 대사관 관저 등으로 사용되다가, 1968년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이 인수하였고 병원 부속 건물로 사용하다, 사적으로 지정된 후 내부 시설이 복원되었다.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공업고등학교의 전신) 건축과를 졸업한 김세연이 설계했다. 1939년 고전주의풍으로 완공한 경교장은 지상 2층, 지하 1층, 연건평 264평 규모로, 좌우대칭형 2층 양옥으로 지어졌는데, 정면 중앙 1층에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승·하차 시설을 갖춘 현관을 설치했으며, 당구실과 이발실을 둔 초호화 건물이었다.
◈ 舊 러시아공사관
이 건물은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장소, 즉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고종이 피신하여 있던 곳인데, 파천중 친일 김홍집(金弘集)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박정양(朴定陽)내각이 조직되었으며, 서재필(徐載弼) 주재의 독립협회가 결성되는 등 역사적으로 다난한 시대의 증인이 된 건물이다.
건물은 6·25사변으로 대부분 파괴되고 현재 지하층과 탑옥부분만 남아 있다. 구조는 벽돌조 2층으로 한쪽에 탑옥이 있으며, 양식은 사면에 무지개모양의 2연창(連窓)과 요소에 박공머리를 두고 있는 르네상스식 건물이다. 원형이 대부분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의의를 감안하여 1977년 9월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 부민관(舊 국회의사당)
일제 말기 대부분의 극장이 일본인 개인소유였던 데 반해, 이 극장은 부립극장으로 시민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곳에서 극단 중앙무대·현대극장 등이 창단공연을 가졌고, 신파극단과 악극단의 공연은 물론 중요한 강연회도 열렸다. 8·15해방 직후 미군이 사용하다가 1949년 서울특별시가 소유하게 되었으며, 1950년 1월 국회의사당으로 용도가 변경되었다.
1975년 9월 1일 국회의사당이 여의도로 옮긴 뒤 시민회관이 되었고, 같은 해 도로확장공사로 규모가 축소되었다. 1976년 세종문화회관이 세워지면서 그 별관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991년부터 서울특별시의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 광통관
광통관은 중구 남대문로에 위치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점포 중의 하나로 우리은행의 전신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은행인 대한천일은행의 본점 건물이다.
대한천일은행은 민족자본을 지키기 위해 조선상인의 청원에 기해 고종황제가 황실자금인 내탕금을 자본금으로 납입해 1899년에 설립된 최초의 민족자본은행이다.
광통관은 1909년에 준공된 2층 양옥의 근대적 건물로 탁지부 건축소가 설계한 건물 가운데 가장 정교한 건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1914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15년에 복구하였으며 장식부와 개구부.돔 등이 원형에 비해 많이 변형되었다.
정문상단에는 조선상업은행종로지점이라고 쓰여진 글씨가 남아있다.
옛날에는 청계천에 있는 광통교 근처에 있어 광통관이라 불렸고 지금은 우리은행 종로지점으로 사용되고 있다.
(천일은행은 1899년에 설립되어 1911년에 조선상업은행, 1945년 해방후에는 한국상업은행, 1999년에는 한일은행과 합병하여 한빛은행, 마지막으로 2002년에 우리은행으로 바뀌었다.)
◈ 대한의원
대한의원 본관은 1907년 3월 착공되어 1908년 11월 준공되었으며, 이후 부속 건물이 세워졌다. 대한의원은 1910년 일제의 한국 강점 이후 조선총독부의원으로 되었다가, 1928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으로 개편되었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이 되었다.
1978년 서울대학교병원 신관이 개원함에 따라 본관 주변의 건물들은 1978~1979년에 모두 철거되었다. 본관 건물은 용도 변경되어 병원연구소로 사용되었으며, 1981년 보수공사를 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 舊 서울역사
서울특별시 중구 봉래동에 있는 철도 역사. 1922년 6월 기공되어 1925년 9월 완공되었다. 건축사적으로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철도 역사이다. 벽돌·철골·철근·콘크리트가 주재료이며 벽은 벽돌과 화강석으로, 바닥은 콘크리트 슬라브, 지붕은 천연 슬레이트와 동판 이음으로 되어 있으며, 르네상스식에 비잔틴 풍 돔을 올린 절충주의 양식 건물이다. 한국 철도의 중심역으로, 1960년대와 1980년대 대규모의 보수공사를 통해 증축, 보완되며 여객 전용 역사로 사용되었으나, 2004년 KTX의 개통과 함께 새로 민자역사가 건축되면서 문화공간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 연세대학교내 스팀슨관
연세대학교에 최초로 세워진 건물로서 1919년 착공하여 1920년에 완성된 돌로 지은 2층건물이다.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자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목사가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서 항구적인 학교건축을 위해 미국 LA에 거주하던 찰스 스팀슨의 기부금을 얻어놓고 세상을 떠난뒤 후임교장인 에비슨이 그 기부금으로 건립한 것이다.
미망인인 언더우드 부인이 초석을 놓았고 당시 화학과 교수인 밀러가 공사를 감독하였다. 설계자는 알 수 없으나 당시 미국인 건축가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설계와 기본계획을 작성하였다고 한다. 장방형의 평면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고딕양식의 건물이다(참조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연세대학교내 아펜젤러관
아펜젤러관은 배제학당을 설립한 아펜젤러를 기념하기 위한 건물로 미국 메사츄세츠주 피츠필드시의 기부금을 가지고 지어졌다. 화학과교수 밀러의 감독하에 1921년 짓기 시작하여 1924년에 완공하였다.
고딕풍의 단아한 건물이며 돌로 지은 3층 건물로 언더우드관과 함께 연세대학교에 두번째로 세워진 건물이다. 평면은 장방형이며 중앙에 현관과 계단실이 있고 나머지는 교실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행정관으로 활용하고 있다(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탈)
◈ 연세대학교내 언더우드관
지금의 연세대학교, 옛 연희전문학교의 건물로 학관(學館)이라 불러왔다.
1921년에 짓기 시작해 1924년에 완성된 돌로 지은 4층 건물로서 아펜젤러관과 함께 연세대학교에 두번째로 세워졌다. 연희전문학교의 창설자인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박사의 업적과 인격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그의 형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지은 것이다. 언더우드 박사의 장남인 원한경 교수가 초석을 놓았고 당시 화학과 교수인 밀러가 공사를 감독하였다.
고딕풍의 건물로 평면은 장방형이며 중앙에 현관이 있고, 지붕은 옆모습이 사람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본래 강의동으로 사용되었지만 현재에는 대학본부 건물로 총장실을 비롯한 중요한 행정부서가 있다.(참조: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탈)
◈ 舊서북학회회관( 건국대학교내 )
이 건물은 1908년에 설립된 애국문화계몽단체였던 서북학회의 회관으로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에 세워졌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서북학회는 기존의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합친 단체였다. 건립후 근대교육의 산실로 자리잡으면서 오성학교, 보성전문학교, 협성실업학교 등이 이곳을 사용하였다. 1939년에는 민중병원을 운영하던 상허(常虛) 유석창(兪錫昶)이 소유하여 광복후 건국대학교의 개교의 초석으로 삼았다. 1956년 건국대학교가 현 캠퍼스로 이전한 뒤 이 건물은 야간부와 법인사무실로 사용되었다. 1976년 도시계획이 시작되어 1977년 이 건물을 해체한 후 그 부재들을 보관하고 있었다. 1985년 이 곳에 복원하였다. 중국인 기술자가 설계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건물은 반지하, 지상 2층 건물로 모임지붕과 중앙 시계탑의 돔, 아치창과 포치가 특징인데 아치주변에는 화강석 장식으로 강조하고 있다. 모서리에 거칠게 쌓은 코너 스톤(corner stone)은 건물의 윤곽을 뚜렷하게 해주고 있다. 현재는 건국대학교 설립자의 기념관과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 운현궁양관
일본이 왕족을 회유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에게 지어준 저택이다.(프랑스풍 르네상스양식)
1911년에에 건립되었는데 1917년 이준용이 죽은 뒤 순종(純宗)의 아우인 의친왕(義親王)의 둘째아들 이우가 이어받았으나 학교법인 덕성학원에 팔린뒤 덕성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사무처로 사용중이다. (출처:두산백과)
이 자리에는 본래 운현궁 사당이 있었다. 화장실과 부엌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접객과 연회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직후 한때 백범 김구가 2층을 집무실로 사용하기도 했다.
MBC드라마 『궁』, KBS2드라마 『각시탈』, tvN 드라마 『도깨비』 등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 서울기상관측소(5호선 서대문역 4번출구)
1932년에 건립된 건물로 세계기상기구(WMO)가 2017년 선정한 "100년 관측소"이기도 하다.
1907년 낙원동에서 경성측우소로 처음 기상 관측을 시작하였고 1933년 현재의 위치인 종로구 송월동으로 이전하였다. 본 등록문화재 건물은 1933년 경기도립경성측우소 청사로 건립된 후 현재까지 기상 관측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기상 관측은 정해진 시각과 일정한 장소에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1998년에 기상청이 서울특별시 동작구 신대방동으로 이전한 이후에도 지금까지 이곳에서 서울 날씨를 측정하고 있다. 현재는 자동기상관측장비가 매 분마다 기상 변동 상황을 수집하여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기상청에 보고하고 있다.
기상관측소의 본관은 사각 형태의 1층 위에 원통형의 건물을 2층의 중심에 두고 그 주위를 몇 개의 작은 입방체 구조물로 결합하였다. 건물 전체는 기하학·추상적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원통형 옥탑 구조물과 곡면의 계단이 특이하다. 아울러 상층부의 돌림띠에는 요철로 장식을 하여 일제 강점기의 근대 모더니즘 건축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건물 부지에는 안개를 측정하는 안개 관측 장비, 지면으로부터 구름까지의 높이를 측정하는 운고계, 구름의 양을 측정하는 운량계, 기체나 액체의 유량을 측정하는 유량계, 비의 양을 재는 우량계, 자동적설관측장비, 증발계 등을 갖추고 있다.(출처:두산백과사전)
◈ 구 벨기에영사관(현 서울시립남서울미술관) 관악구 남현동 1059-13번지, 사당역 2호선 6번출구에서 50m거리
이 건물은 1901년 한국과 벨기에 사이에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세워진 벨기에 영사관이다. 1903년에 착공하여 1904년에 완공됐다. 원래 중구 회현동2가 78번지(현 우리은행 본점 사옥 위치)에 있었는데 1970년 도심재개발 사업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 건물은 1919년 벨기에영사관이 충무로1가로 이전한 뒤 요코하마 생명보험회사 사옥으로 쓰이다가, 일본 해군성 무관부 관저로 쓰였다. 광복후에는 해군헌병대에서 사용하였다. 1970년 상업은행이 이 건물을 사들여 1983년 이곳으로 옮겨 상업은행(우리은행 전신) 사료관으로 사용하였다. 2004년 9월부터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지하1층, 지상2층의 벽돌조 절충식 건물이다. 일본인 건축가 고다마(小玉)가 설계하였다. 붉은 벽돌과 화강석으로 혼용하여 지었고, 건물의 외관은 당시의 일반적인 건물들과는 달리 비대칭형이다. 현관 앞에 있는 두개의 돌기둥과 발코니에 길게 늘어서 있는 돌기둥들은 고전주의적이다. 전면의 창부분은 르네상스식 분위기를 띠고 있으며 1, 2층에 설치된 베란다의 기둥들은 이오니아 양식으로 되어 있다.
좌측면에서 바라본 건물모습
◈ 이화여고 심슨기념관(이화박물관)
사라 심슨(Sarah J, Simpson)이 죽을때 위탁한 기금으로 1915년 이화학당에 세워진 건물이다. 이화학당은 1886년 감리교 여 선교사 스크랜턴이 정동에 있던 자택에 세운 학교다. 처음에는 한옥교사를 사용하다가 1899년 양옥교사인 메인홀, 심슨기념관, 프라이 홀 등을 지어서 본격적인 캠퍼스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메인 홀은 한국전쟁때 파괴되고 프라이 홀은 1975년 화재로 소실되어, 옛 건물 중에는 이 심슨 기념관만 남아 있다.
이 건물은 지하 1층 지상3층의 벽돌조 건물로, 6.25사변때 폭격으로 무너진 부분을 1961년 변형된 모습으로 증축하였다. 이후 2011년 10월 교내에 흩어져 있던 벽돌과 화강석으로 원형을 복원하여 아치창과 화강석 키 스톤이 경쾌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중앙에 현관과 계단실을 둔 중복도식 구조로, 지금은 이화박물관, 교과교실, 자율학습실 등 다양한 교육 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은 경희궁 공원부지에 1988년에 개관하였으나 2005년 옛대법원 자리인 지금의 자리로 이전,개관하였다.르네상스식 건물인 본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재판소인 평리원(한성재판소)이 있던 자리에 일제가 1928년 경성재판소를 지었고 광복후 대법원으로 사용되었다. 1995년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옮겨간 후 서울시립미술관이 자리잡았다.
옛건물의 아치형 현관 일부만 남기고 새로 탄생한 미술관은 지하2층, 지상3층으로 신축하였다.
◈ 신아기념관
신아기념관(新亞紀念館)은 1930년대 건립된 것으로 신아일보사(新亞日報社)의 별관으로 사용됐던 건물이다. 서울시 중구 정동에 위치하고 있다. 1930년대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건축된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미국기업인 싱어미싱회사 한국지부로 사용되다가, 1963년 신아일보가 매입하여 1975년 3, 4층을 증축하여 별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신아기념관은 일제강점기의 건축기법과 언론 통폐합이라는 한국 근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신아일보는 19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경향신문에 흡수·통합되었으며, 현재는 여러 업체들이 입주한 민간 사옥으로 이용되고 있다.
1930년대 까지 철근 콘크리트구조는 관공서를 지을때만 사용하였는데 이건물은 민간 건축이면서 철근콘크리트 구조를 적용하였다. 1층 중앙 출입구의 돌출부와 계단, 그 위의 발코니에서 건립 초기 이 건물이 정동거리에서 자아 냈을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내부의 기둥과 바닥 구조, 벽난로 등이 옛모습대로 남아 있어 건축 기술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다.
◈ 구 조선중앙일보 사옥(농협중앙회 종로금융센타)